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KDC : 911.057
도서 한국 근대사 산책. 1권-5권
  • ㆍ저자사항 강준만 지음
  • ㆍ발행사항 서울: 인물과사상사, 2007
  • ㆍ형태사항 5책: 삽화, 초상; 23 cm
  • ㆍISBN 9788959060757(1)
  • ㆍ주제어/키워드 한국 근대사 산책
  • ㆍ소장기관 강경도서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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EM0000049493 v.3 [강경]종합자료실
911.057-강858ㅎ-3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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상세정보

<'자위'와 '자학'을 넘어선 한국 근대사 읽기 한국 근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<한국 근대사 산책> 시리즈.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면서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정리하였다. 여러 분야의 자료를 수집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하고..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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목차

한국 근대사 산책 5권 - 강준만 지음
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를 종합하고 있는데, 전문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당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망라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, 현재화하면서 ‘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’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‘메타 역사’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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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국 근대사 산책 1 -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

머리말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
근대사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|전문화?세분화에서 종합화?총체화로|역사의 현재화를 위하여|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|역사 서술 시각의 문제|도식주의를 넘어서| 식민사관과 안티 식민사관을 넘어서|역사의 명암(明暗)을 보자

제1장 천주교 박해
01 동방의 조상 숭배는 우상숭배다
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의 충돌|1785년 천주교를 사교(邪敎)로 규정하다|1789년 프랑스혁명|1791년 진산사건|문체반정 논쟁
02 당파싸움으로 증폭된 신유?기해박해
주문모?강완숙의 활약|신유박해와 오가작통법|동정녀 신드롬과 도모지 사형|황사영 백서 사건|신유박해가 식민지화 원인의 시작|부정부패와 1811년 홍경래의 난|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충청도 방문|왕만 바뀌면 재개되는 천주교 박해
03 이양선의 출몰과 여항문화
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|1854년 일본의 개항|이양선은 충격과 공포의 대상|시계와 피아노|한양 중인계급의 여항문화|1860년 북경 함락에 대한 낙관주의

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
01 삼정문란으로 수탈당하는 백성
전정?군정?환정의 문란|농민의 간도?연해주 이주|민란상사(民亂常事)의 시대
02 고종 즉위, 대원군 등장
세도정치가 만든 어린 임금들|비변사 개혁과 서원 철폐|경복궁 중건의 명암|사치 금지령과 호포법
03 동학 창시자 최제우 처형
1860년 4월 5일 동학 창시|동학의 극단적 정신주의|조선 정부의 동학 탄압|유생들의 조직적 동학배척운동

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
01 병인양요를 불러온 병인박해
프랑스로 러시아를 막는 이이제이(以夷制夷)|대원군의 결백 콤플렉스|여성 순교자가 더 많은 이유|조선에서 22년을 지낸 다블뤼의 변화
02 제너럴셔먼호 사건
제너럴셔먼호는 무장 해적선|영국인 선교사 토머스|박규수의 활약|김일성 증조가 셔먼호 격침을 지휘했나?
03 병인박해를 악화시킨 병인양요
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은 50여 일|천주교도 8000여 명을 죽인 학살극|불안과 공포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|돌아오지 않는 외규장각 도서
04 보부상의 정치조직화
군사력의 무능을 보완한 보부상|보부상의 정보 수집?전파 기능|지방장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
05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
통상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만행|배외감정의 격화|오페르트의 <금단의 나라 조선>
06 조선과 미국이 충돌한 신미양요
1871년 이필제의 봉기|아시아에서 성조기를 최초로 게양한 전투|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|박규수의 ‘예의지방’ 비판|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?|어재연의 수자기(帥字旗)를 돌려다오

제4장 강요된 개항, 근대의 시작
01 대원군 퇴진과 의자 뺏기 놀이
최익현의 탄핵소|최익현?이항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?|호포법과 사색당쟁의 영향|고종의 생각이 결정적 이유|한국의 권력 탐욕 문화|공조판서 평균 재임기간 52일
02 일본이 조작한 운양호 사건
1873년 일본의 정한론 번성 이유|한일 국교 교착의 책임|운양호 사건의 전말|조작을 밝힌 일본측 보고서
03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병자수호조약
페리함대의 일본판(日本版)|조선 사대부의 통상에 대한 경멸|최익현과 김인승|1876년은 근대의 시발점
04 수신사 파견과 개항 이후의 풍경
최초의 수신사 파견은 실패|일본인들의 사기적 통상|옥양목 열풍과 비누
05 1870년대의 생활문화
천연두와 종두법 실시|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|신재효의 판소리|조선인은 착한 미개인?|양반의 백성 착취

제5장 개화파의 등장
01 박규수의 개화파 육성
개화사상의 3비조(鼻祖)|김옥균과 중화사상|박영효와 민영익
02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한국인
고고(孤高)의 사상가 최한기|최한기는 한국 과학의 아버지|최한기를 외면하는 식민지성
03 급진개화파?온건개화파?위정척사파
중인계급의 진취성|유홍기는 누구인가?|개화파의 만국공법 공부|개화파 대(對) 위정척사파|위정척사파의 중화주의?사대주의|위정척사파의 시대착오성|문명개화론 대(對) 동도서기론|2000년대의 위정척사파 논쟁

제6장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
01 이동인, 고종을 만나다
이동인의 귀국|조선인을 매료시킨 성냥|국왕의 밀사가 된 이동인
02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?
일본의 국민적 영웅|<학문의 권장>과 <문명론의 개략>|일본의 문명화=서양화=반(反)유교|후쿠자와의 조선관
03 황준헌의 <조선책략> 파동
친중(親中), 결일(結日), 연미(聯美)|영남 유생들의 만인소|위정척사파?개화파의 언론전|이재선 반역 사건|2007년의 조선책략 논쟁
04 일본 시찰단 파견과 아시아주의
위정척사파 몰래 떠난 시찰단|개화파와 후쿠자와의 만남|흥아회의 아시아주의

제7장 서양에 문을 연 조선
01 1882년 조미수호조약
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|조미수호조약의 평가|<한국, 그 은둔의 나라>|너무 늦은 건 아닌가?|조미수호조약과 한미 FTA
02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
신라의 통일을 가능케 한 축국?|1882년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|2004년에 재현된 갑판축구
03 외국군의 주둔을 불러온 임오군란
화적으로 전락한 농민|왜놈을 몽땅 죽여버리자|290년 만의 대사건|대원군의 재집권|대원군, 33일 만에 물러나다|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’과 개화윤음|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분리|민비의 51일간 피신|보부상과 혜상공국|자장면과 임오일기|2006년 용산기지 논쟁
04 태극기의 국기 제정
어떻게 태극기가 선정되었나?|김원모?김영환의 발견|국내 국기 게양은 언제부터인가?

제8장 근대언론의 탄생
01 미국 공사 입국, 미국 보빙사 파견
조선은 단물 빠진 껌|1883년 동문학교 설립|민영익 등 보빙사 미국 파견|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유길준
02 유길준과 사회진화론
유길준과 모스의 만남|모스는 유길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|사회진화론이란 무엇인가?|사회진화론과 자유주의
03 한국 최초의 신문 <한성순보>의 창간
원산학사의 설립|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|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기자?|<한성순보> 이식설 논쟁|<한성순보>와 사회진화론|<한성순보>의 상업제일주의|우정국 설립
04 <한성순보> 이전의 언론
조선의 왕성한 언론 활동|유생의 상소문화|만인소와 풍문탄핵|공론장 논쟁|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

제9장 급진파와 온건파의 충돌
01 조영신조약과 조러수호조약
박영효?김옥균 등 개화파의 오판|조미조약이 아니라 조영신조약이 규범|청을 견제하기 위한 조러수호통상조약
02 미국 보빙사 단장 민영익의 귀국
민영익과 김옥균의 결별|민영익의 변화 이유|미국의 조선 박대
03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
미국의 무디 부흥|소래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|알렌의 입국
04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
고종의 소극적 동의|개화파의 잔혹함에 대한 고종의 분노|혈기가 지혜를 앞선 청춘정권|청국의 개입, 일본의 변심|급진개화파의 전멸|<갑신일록> 위작설 논쟁
05 갑신정변 평가 논쟁
갑신정변 실패의 원인|책임 윤리의 문제|급진개화파의 민심 오판|민중계층의 적극적 참여?|평가의 기준이 문제다
06 갑신정변 주역들의 일본 망명생활
김옥균 이용가치의 소멸|후쿠자와의 탈아론|급진개화파 암살 시도|1886년 김옥균의 상소


한국 근대사 산책 2 -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

제1장 갑신정변의 유산
01 알렌의 민영익 치료, <한성순보>의 폐간
실질적인 개신교 입국|<한성순보>의 폐간|<한성순보>와 청국의 갈등|광인사의 출판활동|사진의 수용과 부작용
02 한성조약과 톈진조약
한성조약과 온건개화파의 득세|김윤식의 시무론|톈진조약의 두 얼굴
03 쌀의 품귀, 담배의 확산
1884년 방곡령 실시|연초제조소?판매소의 집중 설립|담뱃대 사용 금지령|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

제2장 개신교의 활약, 거문도 사건
01 언더우드?아펜젤러의 입국
1885년 4월 5일 부활절|언더우드와 알렌|정동제일교회의 창립|성경 번역과 찬송가 전파
02 제중원 설립과 선교사들의 갈등
백성을 구제하는 제중원|선교사들의 사치 이유|선교사들의 내부 갈등|음주?흡연을 죄악시한 청교도주의
03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
청?러시아?영국의 각축전|후쿠자와의 악담|대원군의 귀국|조선 왕을 감독하는 총독이 된 원세개|웨베르와 손탁의 입국|거문도 사건의 역사적 의의|거문도 사건의 세 가지 일화
04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
유길준의 귀국|유길준과 김옥균의 만남|유길준과 부들러의 중립화안|햇빛을 보지 못한 중립화론

제3장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
01 전신 개통, <한성주보> 창간
경인 전신업무 개시|<한성주보>의 창간|한국 최초의 신문광고
02 배재학당?이화학당 개교
육영공원의 설립|배재학당의 설립|이화학당의 설립|기독교가 선도한 출판문화|천주교?개신교의 갈등
03 경복궁 건청궁을 밝힌 전기
건청궁을 밝힌 100촉짜리 전구 두 개|물불?묘화?덜덜불?건달불|<전기 100년사>의 재발견
04 주미한국공관 설립
원세개의 방해공작|알렌의 일기에 나타난 박정양 일행의 모습|박정양?이하영?이완용|데니의 <청한론>

제4장 근대화에 대한 공포와 저항
01 외국인이 조선 아동을 잡아먹는다
종두술을 보급한 지석영의 수난|1888년 영아 소동|제중원이 영아 살해의 총본산?
02 박문국 폐지, <한성주보> 폐간
재정난으로 인한 <한성주보> 폐간|1994년 <한성주보> 제16호 발견|서양 미술의 전파
03 1880년대 후반의 민생고
양반계급의 부정부패|일그러진 입신양명 문화|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약탈|민족공동체에서 교회공동체로
04 원세개의 횡포, 알렌의 도전
조선 상인의 철시동맹파업과 시위투쟁|원세개의 라이벌은 알렌|왜 원세개만 가마를 타고 입궐하는가?

제5장 동학농민전쟁
01 동학교도의 보은?원평 집회
농민항쟁의 폭발, 동학의 확산|동학의 교조신원운동|동학의 보은?금구?밀양 집회|보은 집회에 대한 평가|북접?남접의 갈등
02 동학농민군의 정읍 고부 봉기
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|고부 봉기를 키운 이용태|왜 하필 호남인가?
03 김옥균 암살 사건
김옥균 암살 시도|김옥균, 중국 상하이로 가다|홍종우의 총탄 세 발에 쓰러진 김옥균|김옥균의 무덤은 세 개|김옥균 부인 유씨의 한(恨)
04 김옥균?홍종우 평가 논쟁
일본은 김옥균 암살계획을 몰랐는가?|홍종우, 출세를 위한 변신이었나?|조재곤의 홍종우를 위한 변호|일본의 김옥균 이용|북한의 김옥균 평가|신복룡의 평가|하영선?허동현의 평가
05 동학농민군의 고창 무장 기포
고창 무장 기포|부안 백산 대회|황토현 전투|5?16은 이념 면에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?|김대중의 참여 때문에 빚어진 사건
06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논쟁
고부 기포설 대 무장 기포설|무장 기포에 대한 정읍의 반발|정읍?고창 관계자들의 논쟁|무장 기포 기념일 행사|백산 봉기 기념일 행사|정읍시의회의 성명서 채택
07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
농민군의 함평 점령, 대원군 감국 통보|청군?일본군의 출병|전봉준?김학진의 상충되는 고민|전주화약(全州和約) 체결|농민군의 집강소 통치|손화중의 무리가 최강|남조선 개벽을 꿈꾼 김개남|동학농민군 전주 입성 113주년 기념행사

제6장 청일전쟁과 갑오개혁
0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
일본 낭인들의 입국|천우협과 전봉준의 만남|조선 병사의 피로 물든 경복궁|대원군의 재등장
02 조선의 재앙이 된 청일전쟁
풍도 앞바다에 수장된 청 병사 1000명|러일전쟁을 위한 전초전?|조선 민중의 공포와 고통|일본의 평양 전투 승리|청일전쟁의 기본 구도는 아직 살아 있다
03 자율과 타율 사이에 선 갑오개혁
갑오개혁 자율론과 타율론|사회신분제 폐지|400년 묵은 과부 재가 논쟁|유길준과 김홍집|일제의 꼭두각시를 거부한 대원군|박영효?서광범의 귀국|이노우에 가오루의 등장, 대원군의 퇴진|과거제도 폐지의 충격|이승만의 인생이 뒤바뀌다|너무 늦은 신교육으로의 전환
04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
전라감사 김학진의 제안|전봉준?김학진의 의기투합|삼례 재봉기|왜 7월에 봉기하지 않았나?|일본군의 다롄?뤼순 점령
05 공주 우금치 전투의 비극
남?북접간의 노선 차이|7일간의 우금치 혈투|동학군의 계급적 고립|전봉준의 체포?압송|김개남의 체포?효시|학살당한 농민군은 최소 20만 명|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
06 김홍집?박영효 연립내각 수립
박영효 내무대신, 서광범 법무대신|민비와 박영효의 일시적 화해|김홍집?박영효 연립내각의 한계

제7장 동학농민혁명의 좌절
01 홍범 14조 제정 반포
홍범 14조의 내용|매우 불길한 행사?|고종의 눈물겨운 노심초사|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
02 망명 유학 10년 만에 귀국한 윤치호
조선 기독교 대표자의 탄생|윤치호의 유교 비판|일본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
03 일본 <한성신보>의 창간
조선 신문이 없는 7년 8개월간의 공백|<한성신보>의 침투전략|최초의 신소설도 <한성신보>에?
04 전봉준?손화중 처형
민중의 영웅으로 각인된 전봉준|새야 새야 파랑새야, 녹두밭에 앉지 마라|이준용 모반 사건|3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콜레라
05 동학농민혁명 논쟁
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|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|유영익의 주장|박노자?하원호의 논쟁|허동현의 주장|배항섭의 주장|김용옥의 주장|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|전봉준은 동학교도였나?

제8장 3국 간섭?을미사변?단발령
01 러시아?독일?프랑스 3국 간섭
시모노세키조약|일본의 랴오둥반도 반환|정동파의 대두|박영효의 재망명|여우사냥을 위해 입국한 미우라 고로
02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
일본 낭인들의 천인공노할 범죄|대원군의 처신|제3차 김홍집내각과 을미의병|유길준의 역할|민비 시신 능욕설|뮤지컬 <명성황후> 논쟁|명성황후 우상화?|시해범 후손들의 사죄 방문|명성황후 사진 논쟁
03 실패로 끝난 춘생문 사건
민비 시해 6일 만에 떨어진 황후 간택령|공포로 잠을 못 이룬 고종|미국공사관으로의 피신 기도|춘생문 사건은 일본의 음모?
04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의 귀국
11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|서광범의 활동|유길준의 지원|일본의 방해 공작|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
05 태양력 도입?변복령?단발령
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|1990년대까지 지속된 과세 논쟁|변복령에 대한 저항|강압적인 단발령 시행|최익현과 보형(保形)의병|피차 양보할 수 없는 상징 투쟁|이승만과 김구|단발령 특수|조선은 모자의 나라
06 운산금광 채굴권 양여
외국어학교의 설립|알렌이 따낸 운산금광 채굴권|노다지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|고종의 미국 짝사랑이 잉태한 결과
07 전신과 우편의 발달
1891년 북로전선 개설|민중의 전신 시설 파괴|1895년 우편업무 재개

한국 근대사 산책 3 -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

제1장 갈 곳을 모르고 헤매는 조선의 운명
01 고종의 아관파천
아관파천의 배경과 내막|‘김홍집?유길준 등을 잡아 죽이라’|단발령 철회|을미의병의 보수성|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생활|‘아관파천은 엄상궁의 작품’|아관파천에 대한 평가
02 <서유견문>의 기구한 운명
<서유견문>의 금서화|개화의 등급과 종류|오늘날의 <서유견문> 평가
03 차라리 가난이 다행이었던 민중의 삶
양반계급은 ‘면허 받은 흡혈귀’|김구의 관찰|조선인의 식탐과 폭식|조선농민의 간도?연해주 이주
04 김구의 치하포 사건
김구는 왜 일본인을 살해했는가?|사형 위기에 처한 김구|전화가 김구의 목숨을 살리다

제2장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등장
01 최초의 민간지 <독립신문>의 창간
<독립신문> 창간 배경|정동파의 역할|정부의 적극적 지원|<독립신문>의 한글혁명|<독립신문>의 역사적 의미|<독립신문>이 내세운 ‘개화’의 의미|<독립신문>의 독자|<독립신문>의 광고|<독립신문>의 사업|‘최초의 민간지’ 논쟁
02 <독립신문>의 편집정책과 방향
사실과 뉴스를 앞세운 신문|<독립신문>의 계몽주의|<독립신문>의 ‘옥시덴탈리즘’|<독립신문>의 기독교 예찬|<독립신문>의 제국주의?의병관
03 독립협회 창립, 애국가의 등장
독립문?독립관?독립공원|독립협회 논쟁|‘한국 최초의 근대잡지’ 논쟁|애국가?창가의 등장|운동회 붐
04 배재학당의 성장과 이승만
배재학당의 정부 위탁교육|이승만의 배재학당 입학|이승만의 배재학당 생활|협성회 발족|협성회의 토론회 활동|1897년 숭실학교 개교

제3장 대한제국 시대의 개막
01 고종의 경운궁 환궁
러시아 군사교관단 파견|로바노프-야마가타 의정서|1년 만에 끝난 러시아 공사관 생활|정부의 <독립신문> 탄압
02 대한제국과 황제의 탄생
‘국왕 전하’→‘대군주 폐하’→‘황제 폐하’|칭제건원 찬반논쟁|칭제건원 평가|대한제국 밖의 냉소적 시선|대한제국?광무개혁 평가 논쟁|환구단의 흔적을 찾아서
03 개신교 성장의 정치학
개신교의 충군애국|교회의 치외법권적 보호 기능|<죠션크리스도인회보> <그리스도신문> 창간|크리스마스 문화의 확산
04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하다
1896년 10월 2일 최초의 전화 개통|전화를 거는 예절|‘대청전화’의 위력
05 개발권 양여, 매관매직
미국의 무관심|일본의 독식화|이권문제에 대한 <독립신문>의 변화|고종의 매관매직과 미신 사랑

제4장 민권의식의 성장
01 배재학당 <협성회회보>의 창간
협성회의 성황|이승만의 주도|최초의 배달제
02 대원군 사망, 명동성당 완공
“주상이 보고 싶다”|명동성당 완공|대원군에 대한 평가|대원군 평가와 민비 평가
03 제1차 만민공동회
1만 명이 모인 ‘만민공동회’|만민공동회의 러시아 규탄|독립협회의 자기역량 과대평가|만민공동회의 배후는 일본?|러시아의 입장|니시-로젠 협정
04 최초의 일간지 <매일신문> 창간
창간 주체 이승만의 긍지|<독립신문>과의 경쟁 선언|<매일신문>의 혈기 왕성
05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
서재필의 출국에 반대한 만민공동회|“흐르는 눈물이 한강을 이루었다”|서재필 평가 논쟁|<독립신문>의 소유권 논쟁|서재필의 제국주의?의병관 논쟁|서재필을 어떻게 볼 것인가?

제5장 만민공동회의 도전
01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
독립협회의 상원설립운동|황국협회의 하원설립운동|안경수의 정변(政變) 미수사건|독립협회의 이토 히로부미 환영
02 <제국신문> <황성신문> 창간
1898년의 언론사적 중요성|<제국신문>의 창간 배경|<제국신문>과 외국인 용병사건|<황성신문>의 창간 배경|<황성신문>의 필진|<황성신문> 사장 남궁억의 수난
03 고종 독살음모 사건과 커피
고종의 커피 사랑|고종 독살음모 사건|손탁호텔과 커피|‘사교계의 여왕’ 배정자|커피는 서양 문물?분위기의 상징
04 제2차 만민공동회
‘평화적 혁명이 이루어졌다’|관민공동회 개최 결의|장지연과 최익현의 충돌
05 제3차 만민공동회
관민공동회와 ‘헌의 6조’|백정 박성춘의 연설|무어의 백정 인권 운동|중추원 의관 선거 공고

제6장 만민공동회의 좌절
01 익명서 조작사건
독립협회 간부 20명 체포령|11세 소학생 장용남의 ‘피를 토하는 연설’|보부상의 만민공동회 습격|2배로 늘어난 만민공동회 인원
02 김덕구 장례식 사건
황국협회의 의병 선언|의관 50명의 중추원 성립|의사 김덕구의 탄생
03 박영효의 배후 조정
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|박영효 일파에 포섭된 이승만|이승만의 과격성|만민공동회 폭력화의 배후
04 만민공동회?독립협회 불법화
종로는 ‘조선의 아크로폴리스’|‘신문지 조례’의 제정|독립협회?만민공동회의 역사적 의의|‘만민공동회는 일본이 사주해 일으킨 소요’?
05 박영효 쿠데타 음모사건과 이승만 체포
박영효의 쿠데타 음모|이승만은 최초의 권총 탈옥수|박영효의 집념
06 윤치호?이완용의 변절
윤치호의 덕원부윤직 임명 수락|윤치호의 유교 비판과 친일 논리|이완용의 독립협회 활동|이완용에 대한 긍정 평가|문명개화론의 함정
07 최시형 처형, 영학당 사건
1898년 최시형 처형|영학당의 봉기|강일순의 증산교

제7장 전차?철도와 조혼?축첩
01 전차 개통과 ‘전차 소각 사건’
한성전기회사 설립|1899년 5월 17일 전차 개통식|전차에 대한 호기심과 반감|기독교인 도륙비지 사건
02 대한국 국제 반포
‘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’|대한국 국제 평가 논쟁|정부보다는 개신교가 더 나은 보호막
03 경인철도 개통 자전거 인력거
“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!”|‘불을 뿜어내는 수레’|윤치호의 축지법?|인력거의 보급
04 <독립신문> <매일신문> 폐간
<시사총보>의 창간|<매일신문> 폐간, <상무총보> 창간|<독립신문> 폐간과 고종의 언론관|북한의 <독립신문> 평가|<독립신문> <황성신문>의 인종주의?아시아주의
05 조혼?축첩 청산운동
여성단체 찬양회 조직|<독립신문>의 조혼풍습 비판|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조혼|<독립신문>의 축첩제 비판|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축첩제
06 1890년대 말의 식산흥업?양전사업
조선은행?한성은행의 설립|대한천일은행 설립|광무 양전(量田)?지계(地契)사업

제8장 외세 지배의 심화
01 활빈당의 출현
중국 의화단의 난|경제적 침탈에 대한 저항|활빈당 평가 논쟁|일본 우익단체 흑룡회 창립
02 외국 쌀 먹으면 애비 에미도 몰라본다
1901년 안남미 수입 파동|내장원 쌀장사 논쟁|국가재정?황실재정 논쟁
03 <제국신문>과 이승만의 옥중생활
감옥에서 <제국신문> 논설 집필|이승만의 기독교 선교|이승만의 감옥 내 집필활동
04 이재수의 난
1898년 방성칠의 난|천주교의 오만과 횡포|천주교인들의 폭력 대응|천주교도 700명 사망, 이재수 교수형|박광수의 영화 <이재수의 난>|천주교의 민간풍습에 대한 적대적 태도
05 개신교?천주교의 충돌
개신교 선교사는 ‘백만장자’|천주교인의 개신교인 구타 사건|‘국가보다 기독교를 더 신뢰한다’|정길당 사건

제9장 하와이 이민
01 최초의 노동이민단 출발
솔나무 밑에서 죽어간 사람들|102명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 출발|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|2002년에 발견된 ‘이민자 모집 광고지’
02 영업용 전기, 공중용 전화의 등장
1900년 영업용 전기의 판촉|한국 전차?전기사업의 좌절|1902년 최초의 공중통신용 전화업무 개시|공사관 건물의 위엄 효과
03 최초의 화장장 완공
화장은 ‘왜놈들의 장법’|한국의 독특한 장례문화|의학에서의 해부 금지|아펜젤러 사망

한국 근대사 산책 4 -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
제1장 러일전쟁 전야
01 용암포 개항사건
4년 동안 20번 바뀐 외부대신|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|러일전쟁 개전설과 삼국제휴론|양무호 사기 사건
02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
즉위 40주년, 50회 탄신일 잔치|월미도 매각사건|웨베르의 한국 방문 소감
03 간도 민족주의의 등장
장지연의 <대한강역고> 출간|1712년 백두산정계비 논란|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|간도관리사 이범윤의 활약
04 원산 부흥운동과 YMCA의 탄생
회개와 눈물의 원산부흥운동|‘청년’을 발견한 황성기독청년회의 탄생|YMCA의 교육?계몽 활동|단일교회의 좌절|장로?감리교의 선교방법 차이

제2장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
01 한반도 쟁탈을 위한 러일전쟁
영일동맹과 노불선언|일본의 38도선 분할론 제시|일본의 전쟁 전략|제물포 해전|충격에 휩싸인 조선 조정|러시아의 ‘영웅 만들기’|‘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쟁탈 전쟁’
02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든 한일의정서
한국의 러일전쟁 병참기지화|도탄에 빠진 민생|아시아주의의 망령
03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과 한일협정서
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와 보안회의 반대투쟁|한일협정서(제1차 ‘한일협약’)와 고문정치|친일단체 일진회의 발족|보부상들의 공진회 활동
04 <대한매일신보>의 창간
영국 기자 베델을 사장으로 내세운 신문|박은식?신채호의 참여|일본인 신문들의 창간|<황성신문> <제국신문>의 경영난

제3장 갑진개화운동과 위생청결법
01 동학교단의 신문화운동
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의 활동|진보회의 단발흑의(斷髮黑衣), 바리캉의 등장|갑진개화운동의 평가
02 화장실 파동과 화투 열풍
서울 거리는 대소변 투성이|김옥균의 <치도약론> <독립신문>의 계몽|한국인의 똥으로 돈 버는 일본인|일본에서 수입된 화투|개화기는 화투의 개화기
03 이승만의 출옥과 출국
감옥생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 이승만|상동교회 엡워스 청년회|민영환?한규설의 밀사로 도미(渡美)
04 한국인의 왕성한 호기심
‘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’|한국인의 서양인 구경|강한 호기심은 한국인의 장점|“코레아의 태양은 서울에만 뜬다”

제4장 일본과 미국의 결탁
01 강압과 착취로 이루어진 경부철도 개통
한국인이 겪은 고통과 굴욕|철도가 만든 개화미신|1906년 경의선 개통|7살 소년을 총살시킨 야만성?잔인성|일진회의 참여|철도가 결정한 도시의 흥망성쇠|철도는 진정 ‘진보의 상징’이었나?
02 일제의 여순 점령
일본의 첩보전에 밀린 러시아|여순 전투의 정치학|부정적인 한국 이미지의 유포|일제의 외교권?독도?통신권 강탈
03 노예로 팔려간 멕시코 이민
이민자 1000명 중 400명 사망|1901~1905년 7226명 미국 이민|해외 교포신문 발간
04 가쓰라?태프트 비밀협약
일본이 압승을 거둔 쓰시마 해전|미국이 조달해준 일본의 전쟁자금|미국은 필리핀, 일본은 한국을 먹다|2005년 가쓰라-태프트 밀약 논쟁
05 이승만의 루스벨트 면담
윤병구?이승만, 루스벨트를 만나다|루스벨트의 일본 사랑|‘이승만은 애국열성의 청년지사’
06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포츠머스 조약
루스벨트가 주도한 포츠머스조약|일본 국민의 폭동|일제강점이 5년 더 걸린 이유|러일 전쟁 발발 100돌을 맞은 일본|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?

제5장 을사늑약과 시일야방성대곡
01 한국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
앨리스 루스벨트의 한국 방문|“정부 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처하라”|‘을사5적’의 찬성으로 통과된 을사늑약|‘을사5적’인가, ‘을사7적’인가?|민중의 분노|‘침몰하는 배에서 황급히 도망치는 쥐떼’
02 을사늑약 유?무효 논쟁
헐버트?민영찬의 활동|‘을사늑약은 무효다’|고종의 처신|‘낭만주의적 역사인식의 위험’
03 장지연의 ‘시일야방성대곡’
‘오늘이야말로 목 놓아 크게 울 날이로다’|‘거의 집집마다 보관하고 외웠다’|‘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’|곧 잊혀진 ‘시일야방성대곡’
04 민영환의 자결이 촉발시킨 연쇄 자결
민영환의 할복자살|민영환의 유서|서울은 ‘흥분의 도가니’|연쇄 자결
05 알렌은 어찌 되었는가?
알렌과 루스벨트의 논쟁|“미국은 우리에게 맏형처럼 느껴진다”|알렌의 모순

제6장 1900년대 중반의 생활문화
01 천도교로 개명한 동학
손병희의 귀국|천도교로의 개명의 정치학|이용구 등 일진회 간부 출교 처분|이용구의 시천교 선포
02 한국 최초의 공개 축구?야구 경기
축구대회의 확산|‘YMCA 야구단’|최초의 부인용품 상점
03 흰옷금지령과 공창제
천년 묵은 백의 논쟁|검은색은 ‘문명의 색’|일본 매춘문화의 확산|통감부의 적극적인 공창화 정책
04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등장
애국가 작사자 논쟁|1998년 국가상징연구회 세미나|최병헌 유족과 윤치호 유족의 대결|‘한국민족 구성원의 공동 작품

제7장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론
01 일제 통감부 설치
‘상왕(上王)으로 군림한 이토’|고종 밀서 사건|밀서 진위 논쟁
02 애국계몽운동의 시작
이제 남은 희망은 교육|사립학교 설립 열기|학회의 조직과 활동|애국계몽운동 개념 논쟁|선교사와 한국인 신도의 갈등
03 최익현의 의병 봉기
최익현 부대의 실상|최익현의 순국|최익현 평가 논쟁
04 민영환의 ‘혈죽(血竹) 신드롬’
“누가 민영환이 죽었다고 말하는가?”|‘대한제국이 처음으로 낳은 국가 영웅’|민영환 서거 100주년
05 <국민신보> <만세보> 창간
일진회 기관지 <국민신보> 창간|1906년 <만세보> 창간|<만세보>와 일진회의 관계
06 이인직의 <혈의 누>의 정치학
왜 신소설인가?|임헌영의 <혈의 누> <은세계> 비판|이인직의 친일행적|‘애국계몽주의의 통속화’
07 <경성일보> <경향신문> <대한신문> 창간
통감부 기관지 <경성일보> 창간|천주교의 <경향신문> 창간|<경향신문>을 계승한 <경향잡지>|이완용내각의 기관지 <대한신문> 창간

제8장 국채보상운동과 고종 퇴위
01 개신교의 평양대부흥운동
“미워하던 일본인까지 사랑하게 되었다”|3배로 증가한 개신교 신자 수|부산?경남지역은 예외|2007년 ‘평양대부흥 100주년’|‘2007 한국교회대부흥 기념대회’|‘목사안수 100주년 기념 참회기도회’
02 평양대부흥운동의 정치학
안창호의 한탄|주진오?이만열의 평가|김정기?이혜석의 평가|김진호?백찬홍?최형묵의 평가
03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
일제의 화폐정리사업|“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”|거절해도 밀려드는 의연금|일제의 방해공작
04 세브란스병원?대한의원 설립
세브란스병원의 설립|‘알렌 신화’ 논쟁|대한의원의 설립|‘대한의원 100주년?제중원 122주년 기념사업’ 논쟁|“설립정신의 계승이 중요하다”|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
05 헤이그 밀사파견 사건
이완용 ‘3품 내각’의 등장|이상설?이준?이위종 파견|일본과 러시아의 방해공작|<만국평화회의보>의 이위종 인터뷰|이위종의 국제기자클럽 연설|이준의 사망|‘헤이그 특사 파견’ 100주년|이준 열사 순국 100주기 기념행사|헐버트 박사 58주기 추모식
06 고종 퇴위, 순종 즉위
이토?송병준의 퇴위 협박|내시가 대신한 황위 양위식|박영효 체포?유형|순종 즉위, 단발 논란|고종의 러시아 망명설

제9장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
01 정미7조약?군대 해산
“매국노를 수입하려거든 대한으로 건너오시오”|광무신문지법 공포|한국군의 마지막 전투와 해산|‘총포 화약류 단속법’과 호랑이 출몰|의병 총대장 이인영의 ‘어처구니없는 일’|신용하의 새로운 해석|의병의 통신시설 파괴|일진회와 자위단의 행패
02 일본 망명 12년 만에 귀국한 유길준
유길준 쿠데타 음모의 전말|흥사단?한성부민회 창설|왜 유길준은 이토를 지지했나?|유길준의 재발견|2003년 유길준 관련 행사
03 일제 소비문화의 침투
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서울출장소 개설|박람회는 ‘국가적 제전의 가장 중요한 형식’|도쿄권업박람회의 한국인 전시|초상사진 열기
04 자동차의 등장, 열악한 도로 사정
1903년 최초의 자동차 등장|최악의 도로 사정|1908년 최초의 신작로 개통|1905년 교통경찰의 등장|상수도 등장
05 <대한매일신보>의 반일 민족주의
광무신문지법의 효과|일제의 <대한매일신보> 탄압|<대한매일신보>의 의병관과 기독교구국론|장도빈?양기탁의 반일 민족주의 논설|학생들의 ‘단지(斷指) 피바람’

한국 근대사 산책 5 -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

제1장 다시 타오른 애국계몽운동의 불길
01 교육만이 살 길이다
학회의 국민 계몽활동 | 안창호의 신민회 활동 |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 설립 | 기독교 사립학교 붐 | 관?공립학교는 비난의 대상 |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 | 일본 유학생의 활동 |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
02 스티븐스 저격사건
장인환?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| 의병투쟁에 미친 영향 | 이승만의 학업
03 <해죠신문> <신한민보>의 활약
블라디보스토크의 <해죠신문> 창간 | 이범진의 후원과 안중근의 기고 | <해죠신문> <신한민보>의 국내 유입 | <신한민보>의 ‘국민혁명론’

제2장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유산
01 국채보상운동의 좌절
이완용?송병준?이용구의 친일 계보 | 일제의 <대한매일신보> 탄압 | 국채보상운동의 내부 문제 | 베델의 사망 | <대한매일신보>의 몰락 | <대한매일신보>는 베델의 신문? | 윤치호의 국채보상운동?베델 비판 | 국채보상금 처리 문제
02 국채보상운동의 유산
국채보상운동은 ‘여성운동의 효시’ | 1998년 되살아난 국채보상운동 | 243만 명이 참여한 ‘금 모으기 운동’ | 국채보상운동은 ‘한국 엔지오 운동의 역사적 뿌리’
03 최초의 근대 잡지 <소년>의 창간
육당 최남선의 활동 | 최초의 신시(新詩) 〈해에게서 소년에게〉 | 톨슨토이 열풍

제3장 한말 의병운동의 종언
01 순종의 경상?평안?황해도 답사
일제의 보호권 과시 이벤트 | 철저히 연출된 시각적 스펙터클 | 일제의 법죄즉결령 | 대한제국 당시 최대의 부패 관리
02.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
간도의 역사적 기원 | 재(在)만주 조선인 20만 명 | 일제강점 후 새로운 갈등 | 신채호?대종교?이범윤의 활동 | 동북공정과 ‘간도 되찾기 캠페인’
03. 호남의병의 와해
1907~1911년 의병 14만 명 | 헌병대?헌병보조원의 악명 | 일제의 ‘남한대토벌작전’ | 의병운동인가, 의병전쟁인가? | 오영섭의 민중주의사관 비판 | 의병정신은 ‘충군애국론에 기반한 의리심’? | 김상기?구완회의 반론
04 <대한민보> <경남일보>의 창간
대한협회의 <대한민보> 창간 |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 | 최초의 지방지 <경남일보> 창간 | 장지연의 활동 | <한성신보> <대동일보> <대한일일신문>

제4장 사회진화론?영웅숭배주의?문약망국론
01 사회진화론의 융성
양계초의 <신민설> 수입 | 양계초의 주장 | 조선 지식인을 사로잡은 사회진화론 | <월남망국사> 논쟁 | 박노자?허동현 논쟁 | 사회진화론 개념의 혼동
02 영웅숭배주의의 유행
신채호의 영웅숭배주의 | 영웅 전기의 유행 |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
03 문약망국론과 운동회 붐
문약망국론과 상무정신 | 상무정신과 학교 운동회 | 군사훈련식 운동회와 석전

제5장 애국과 매국의 몸부림
01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
안중근 추모 열기 | 안태훈과 안중근 | 안중근과 조마리아 | 안중근 연구의 현황 | 의거 100주년 기념 준비 | 안중근은 ‘충직한 근왕주의자’? | 안중근과 아시아주의
02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의 ‘매국’ 경쟁
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 성명 | 이완용과 송병준의 차이 | 일진회 비난?지지 성명전 | 일진회?서북학회?대한협회 ‘3파 제휴’ 결렬 | 일진회는 오명의 대명사
03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시도
이완용의 파란만장한 ‘변역’ | 이완용 중상, 이재명 사형 | 김구의 후회 | 박원문의 죽음에 대하여 | 이완용에 대한 민심의 분노

제6장 망국 직전의 생활문화
01 영화의 폭발적 인기
영화는 언제 조선에 들어왔는가? |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1903년 |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영화 | 오락 이외에 무엇으로 삶을 위로하랴
02 연극의 인기와 풍기 논란
광무대?단성사의 개관 | 원각사와 이인직 | 신문의 전통연극 비판 |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 | 유성기의 판매와 보급 | 일제의 통제와 탄압
03 개신교의 백만인 구령운동
1884~1910년 개신교 선교사 499명 | 선교 지역의 교파별 점거 | 한국 교회는 ‘선교하는 교회’ | 일제의 탄압엔 정교분리주의 | 20만 신자를 100만 신자로 | 백만인 구령운동의 정치학 | 한국은 세계 2위의 선교대국 | 한국인의 ‘중층다원성’ |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
04 철도?시계가 불러온 시간개념의 변화
1898년에서야 만들어진 관료들의 시간표 | 신문들의 시간엄수 계몽 |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| 시계의 상징적 가치 | 도량형의 표준화

제7장 518년 만에 멸망한 조선
01 일제의 강점
안창호의 〈거국가〉 | 강제병합안 8개항 | 경술 7적과 연쇄 자결 | 왜 8월 29일은 조용했나? | 이광수의 고백 | 모든 국민이 일심동체였을까? | 일제강점 호칭 논쟁 | 일제하 68명의 조선 귀족 탄생 | 일제에 기용된 조선인 관료
02 토사구팽 당한 이용구와 일진회
헌신짝처럼 버려진 이용구와 일진회 | 이용구의 후회 | 이용구와 송병준?이완용의 다른 길 | 흑룡회가 일진회를 속였나?
03 신문과 민족주의의 탄생
한글 글자 공동체의 형성 | 민족의식의 계보 | 민족과 조국 | 민족과 국민 | 신용하?박지향?이진경의 주장 | <황성신문> <대한매일신보>의 광고 분석 | 소통의 빈곤
04 고종?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?
이태진의 <고종시대의 재조명> | 수십여 명의 학자가 참가한 ‘기념비적 논쟁’ | 허동현의 종합 관전편 | ‘편승’을 어떻게 볼 것인가? | 이론의 함정은 없는가? | 내부적 검증?추궁은 충분했는가? |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을 넘어서

맺는말: ‘조선왕조 500년 신화’를 넘어서
‘우리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’ 운동 | 한국은 일류의 자질과 능력이 있다 | 임진왜란의 진실 | 재조지은(再造之恩)의 진실 | 정유재란?정묘호란?병자호란 | 병자호란의 치욕 | 임진왜란?병자호란 이후 | 임진왜란?병자호라과 체제 안정성 | 당쟁?사화가 조선왕조 존속에 기여했다? | 유교?양반 망국론 | 혈통주의의 폐쇄성 | 유교적 가족주의가 500년의 비결인가? | 공식적 가족?자궁 가족의 2중 구조 |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되는 역설 | 입신양명 이데올로기 | 기회주의와 줄서기 | ‘당쟁 망국론’에 대한 반박 | 일제 치하?군사독재의 상흔과 싸우기 | 양반 면책으로 빠진 식민사관 비판 | 한국의 무기력과 침묵 |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? | 한국 정치의 5대 환경 | 당파싸움의 두 얼굴 | 지금도 건재한 양반문화 | 가문 단위의 부정부패 | 2006년 종친회 가입률 22퍼센트 | 한국인의 보호막 투쟁 | ‘보호막 공영화’를 위하여 | ‘면허받은 흡혈귀’를 넘어서 | 성리학의 가족 중심주의를 넘어서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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